세르지오 파리아스 감독이 2004년 한국에 처음 올 때 국내 대부분 축구전문가들은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남미 지도자가 유럽 지도자에 비해 전술과 이론적으로 약하고 조직력을 다지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게 이유였다. 부임 초기 국내 축구인들로부터 시큰둥한 시선 속에 전혀 관심을 끌지 못한 파리아스 감독이 최근 몇년 동안 한국축구판을 뒤집어놨다. 파리아스식 공격축구로 무장한 포항은 경기마다 팬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파리아스 감독이 없었다면 최근 몇년 동안 K리그는 지금보다 훨씬 더 침체됐을 것”이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가 됐다. 포항 축구는 특히 그동안 수많은 국내 축구팬들이 한국축구에 대해 부족하다고 느꼈던 부분을 많이 채워줬다. 포항 축구가 답답한 한국축구에 희망을 던져준 것도 이런 이유다. 그간 유럽축구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꼈던 팬들이 포항이 보여주는 용광로 축구 속에 한국축구의 밝은 미래를 발견하고 있다. 한국축구가 지녀왔던 고질적인 병폐를 극복한 포항만이 갖고 있는 매력은 무엇일까. 10개만 짚어보겠다. 




개인기에서 앞 선다

필자의 말이 아니라 김기동의 말이다. 김기동은 “우리팀에서는 포지션에 상관없이 모든 선수들이 상대 선수들과 1대1로 맞서 밀리지 않는다”면서 “그런 개인기가 팀을 위해 하나로 뭉치다보니 힘이 배가 된다”고 말했다. 수비수 황재원, 미드필더 김기동 김재성, 공격수 데닐손를 비롯해 심지어 교체로 들어가는 선수들 기량도 다른 팀 주전과 맘먹는 수준이다. 베트남, 몰디브 선수 1명도 개인기로 따돌리지 못하는 한국대표팀의 과거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끊임없이 뛴다

포항은 이기든 지든 끝까지 열심히 뛴다. 경기 종료 직전 1~2골 앞서도 대충 뛰는 게 없다. 파리아스 감독이 선수들에게 공격적인 축구를 강조하는 데다 결과보다는 내용을 중시하고 데드타임을 최소화하려는 스틸러스 웨이가 적용되면서 더욱 그렇게 변했다. 포항이 많은 역전승을 일궈내는 힘도 지치지 않은 체력에서 나온다. 축구는 많이 뛴다고 체력이 많이 드는 게 아니다. 경기가 잘 풀리면서 자꾸 이기면 많이 뛰어도 피곤치 않은 게 축구다.

기적을 일궈낸다

포항의 가장 큰 매력이다. 프로축구컵대회 서울전, 아시아챔피언스리그 분요드코르전 등이 그랬다. 1차전 불리함을 극복하며 2차전 역전승을 거두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2차전도 대충 이기는 게 아니라 상대가 혀를 내두르고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완전히 삼켜버린다. 포항에게 혼쭐 난 팀은 다음에 포항을 또 만날 경우 경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몸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만일 포항이 선취골까지 넣는다면 상대는 ‘이제 뒤집기 힘들겠구나’라면서 일찌감치 경기를 포기하는 효과까지 있다.


한국축구 성공 가능성을 보여준다

포항의 힘은 용병이 아니라 토종의 힘이다. 물론 과거 따바레즈, 올시즌 데닐손이나 스테보 등이 팀의 주축으로 활약했지만 이들도 국내 선수들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이만큼 크게 성공할 수 없었다. 참고로 포항은 2006년부터 많은 용병을 써왔다. 그리고 대부분이 브라질 선수였다. 그런데 브라질 선수 중 성공한 선수는 따바레즈, 데닐손 정도 뿐이다. 슈벵크, 조네스, 엔리키, 프론티니, 마우리시오, 알도, 파비아노 등 많은 삼바용병들이 포항에 몸을 담았지만 성공한 경우는 없었다. 따바레스도 파리아스 감독 부임 이전에 있었던 선수이고 데닐손도 파리아스 감독보다는 이전 사장의 의지가 절대적으로 반영돼 데려온 선수다. 브라질 감독인데 성공적인 브라질 용병을 키우지 못한 게 이상하지만 어쨌든 국내 선수들이 주축이 돼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축구의 성공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K리그 경기장도 채울 수 있다

올 시즌 구장별 평균관중에서 포항은 수원(17523), 서울(15928), 전북(13,964), 강원(13,790), 전남(12,193)에 이은 6위(11,569)다. 그런데 앞선 5개 구단 중 몇몇 구단은 관중 뻥튀기를 하고 있어 포항의 순위는 최소한 5위 이상이다. 그리고 관중수를 따질 때 중요한 것은 관중수 자체가 아니라 지역의 인구수다. 서울월드컵경기장에 1만6천명이 오는 것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1만7천이 오는 것은 사실 천양지차다. 포항의 인구는 50만명이다. 그 중에 1만1천여명이 경기장을 찾는다. 포항 스틸야드는 대중교통이 불편하고 시내에서도 제법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포항은 관중석을 뻥튀기하지 않는다. 포항이 스테보의 22초만의 깜짝골, 후반 인저리 타임 결승골을 뽑으면서 서울을 3-2로 꺾은 수요일인 7일 밤. 스틸야드에는 1만명이 넘게 모였다.

고정관념에서 탈피한 자유로운 축구

축구는 숫자 놀음이라고 하지만 포항은 이를 무시한다. 공격수보다 수비가 최소한 1명더 많아야한다는 축구의 기본원칙도 무시될 때가 있다. 상대 미드필더가 4명이라고 포항 미드필더진을 5명 놓지 않는다. 어떨 때는 상대 선수 중 한명을 아예 막지 않을 때도 있다. 파리아스 감독은 이에 대해 “상대가 4명이라고 해서 우리가 굳이 4명 이상을 배치할 필요도 없고 상대 선수를 모두 막을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이유는 이렇다. 파리아스 감독은 “플레이를 하다보면 공격적인 플레이에 거의 관여하지 않은 선수들이 있다”면서 “그 선수를 막느니 공격 핵심요원을 좀더 철저하게 막는 게 바람직하다”고 답한다. 요즘에는 좀 달라졌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포항은 상대 공격수와 동일한 수비요원을 둘 때가 많았다. 굳이 한명 더 수비 쪽에 놓느니 다소 위험을 감수하더라고 공격에 한명 더 놓겠다는 의미다. 파리아스식 자유축구를 대번에 보여주는 말이 있다. ‘상대 오른쪽 공격수가 무척 강하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질문에 대부분 감독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우리 팀중에 가장 좋은 수비수를 붙이겠다” 또는 “2명이 안되면 3명이라도 수비에 가담하게하는 협력수비를 하겠다”는 것 중 하나일 게다. 그런데 파리아스 감독의 답변은 출발부터가 달랐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 선수보다 더 빠르고 좋은 공격수를 그에게 붙여 아예 공격도 수비도 못하게 하겠다.” 이게 파리아스식 축구의 매력이다.



항의하지 않고 벌떡 일어난다


포항 선수들은 좀처럼 항의하지 않는다. 데드 타임도 줄어들고 보는 관중도 흥미를 유지할 수 있다. 프리미어리그가 그렇다. 프리미어리그 선수들은 좀처럼 판정에 항의하지 않는다. 넘어져도 웬만해서는 곧바로 일어나 또 뛴다. 항의를 하더라도 짧게, 아주 짧게 한다. 우리 선수들은 심판을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대들지만 프리미어리그 선수와 심판은 토론하는 분위기다. 포항이 그렇다. 포항은 넘어져도 곧바로 일어나 뛴다. 돈을 내고 들어온 관중에게 최선을 다하는 플레이로 보답하겠다는 의지다. 그리고 심판에게 항의도 거의 하지 않는다. 파리아스 감독이 부임 후 선수들에게 이런 말을 계속 하고 있다. “항의해봤자 판정은 뒤집어지지 않는다. 카드라도 받는 날에는 오히려 팀에 큰 피해를 끼친다.” 심판이 뇌물을 먹지 않아도 애매한 상황 속에서는 이런 감독,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선수에게 마음이 쏠릴 수밖에 없다. 심판도 사람이다.

주전 비주전 기량차 없다

포항은 주전 비주전 가리지 않는다. 1군이 나오든, 1.5군이 나오든, 심지어 2군이 나오든 경기력에 큰 차이가 없다. 국가대표팀에 비교하면 박지성, 이청용이 빠지고 염기훈, 김치우가 나와도, 기성용 대신 다른 선수가 뛰어도, 박주영 이근호 대신 이현승이 출전해도 거의 비슷한 수준의 플레이를 할 수 있다는 의미다. 감독으로서는 많은 경기를 동시에 치르는 과정에서 선수기용에 유연성을 가질 수 있고 선수들도 나도 하면 1군에 주전으로 뛸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다. 물론 보는 관중도 관전의 흥미가 반감되지 않는 채 ‘저 선수가 뭔가 해 줄거야’라는 기대감 속에 경기를 지켜보게 된다. 포항 스틸야드에서는 종료 휘슬이 울리지 않는 한 경기는 끝난 게 아니다.

져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포항은 올 시즌 홈에서 무패행진중이다. 올해 들어 아직까지 패한 적이 없지만 지금 이런 상황 속에서 포항이 진다고 해도 어느 누구도 포항에게 손가락질을 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그간 좋은 성적을 올리면서 많은 즐거움을 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비록 패했다고 해도 포항에게 박수를 보낼 수 있는 것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죽을 힘을 다해 뛰기 때문이다. 한두경기 이길 수도 있고 패할 수도 있는 게 스포츠다. 그러나 질 것 같다고 제대로 뛰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전사가 아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은 입으로 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포항이 하고 있으니 설사 진들 팬들은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팬들이 선수 못지 않게 괴로워할 것이고 그게 바로 선수, 구단, 서포터스 등 포항 스틸러스와 관계된 모든 구성원들이 한배를 타고 있다는 증거다.

심장을 뛰게 만든다

화끈한 역전승을 올리는 드라마틱한 경기력, 한국에 딱 알맞는 크기 경기장에 모여든 열혈관중. 이 두가지만으로 스틸야드를 찾는 축구팬들의 심장은 미칠 듯이 뛴다. 스틸야드에서는 “축구, 재미없다” “입장료가 아깝다”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어린 아이는 물론 많고 과거 축구에 큰 관심이 없었던 중년 아주머니들도 자주 눈에 띈다. 스틸야드에서 경기를 보고 있노라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올드 트래포드가 부럽지 않고 입장료 1만원도 물론 아깝지 않다.

Posted by 김세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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