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올림픽 & 정치, 사건 사고, 테러, 스캔들

 올림픽에는 좋은 면만 있는 게 아니다. 올림픽의 정치적 이용, 올림픽 기간 중 발생한 사건·사고와 테러, 약물복용 등 선수들의 스캔들도 많이 일어났다. 올림픽 역사를 ▲정치 ▲사건·사건 ▲테러 ▲스캔들 등 네 가지 분야에서 되돌아본다. 스포츠 사화학적인 이론도 양념처럼 뿌렸다.


  ■올림픽과 정치

 1984년 LA올림픽 조직위원장인 퍼터 위베르스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올림픽이 단순한 운동경기가 아니라 정치 이벤트라는 걸 직시해야 한다”고 말이다. 스포츠를 통해 국가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것이 강대국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정치, 경제력이 다른 국가들은 국제적인 인지도와 정권의 합법성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스포츠를 이용했다. 이는 올림픽도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인 게 보이콧과 올림픽 유치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앞서 미국과 62개 동맹국들은 구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결정에 항의하는 표시로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자치를 지지하며 무기를 지원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구소련과 14개 동맹국들은 올림픽 상업화에 대해 항의하고 미국 강경론자들의 테러 위협을 거론하며 1984년 LA올림픽 보이콧 결정을 내렸다. 이 두 올림픽은 적잖은 나라들이 보이콧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최됐고 미국과 구소련은 무더기 메달로 자국의 힘을 과시하는데 혈안이 됐다.

<올림픽 보이콧 국가 그래픽>

 1936년 베를린 올림픽도 정치적으로 이용된 사례다. 독일은 올림픽을 유치함으로써 내부적으로 나치 권력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대외적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력을 이기기를 원했다. 공교롭게도 바로 전 올림픽이 1932년 LA올림픽이었다. 독일은 LA올림픽보다 무조건 잘 치러야한다는 일념으로 10만 명이 들어갈 수 있는 대형 경기장, 실내체육관 6개 등 많은 경기시설을 새로 건설했다. TV와 라디오 등 중계시스템도 정비해 세계 41개국에 뮌헨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자랑하려고 했다. 또 베를린을 정돈되고 깨끗한 도시로 보이게 하려고 집시 등 일부 유랑 민족들을 특정한 곳에 격리시키기까지 했다. 그레텔 베르그만은 올림픽 직전 여자 높이뛰기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웠지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베를린 올림픽에 앞서 미국에서는 베를린 올림픽 보이콧 여부를 놓고 거센 논쟁이 일어났다. 표결까지 간 끝에 2와 2분의 1표차로 참가가 결정됐지만 과정은 가시밭길이었다.

<베를린올림픽 미국과 독일 선수단 인사>

 1964년 도쿄올림픽은 일본이 전쟁 이후 번영한 세계 국가들의 친구임을 보여준 대회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서울은 더 이상 전쟁의 피해를 받은 후진국이 아님을 전 세계에 선포했다. 2008년 올림픽을 주최한 베이징도 중국이 안전한 나라이며 세계적인 빅 스포츠 이벤트를 무사히 치를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한 국가임을 뽐냈다.

 스포츠 사회학적인 해석에 따르면 정부가 스포츠를 통해 얻으려고 하는 목적을 8가지로 분류했다. ①공공질서 보호 ②공정성 확보 ③건강 유지 ④국가 명성과 권력 확산 ⑤일체성과 소속감, 단결·단합 촉진 ⑥지배적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가치 재생산 ⑦정치 리더와 정부에 대한 지지 확대 ⑧경제 및 사회 발전 촉진 등이다. 스포츠는 숙명적으로 정치와 떨어져 생각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올림픽과 사건·사고

 가장 유명한 것은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발생한 블랙 파워 솔루트(Black Power Solute)다. 그해 10월16일 남자 200m 시상식에서 1위 미국 토미 스미스, 3위 미국 존 카를로스는 미국 국기가 게양될 때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둘은 ‘인권을 위한 올림픽 프로젝트(OPHR·Olympic Project For Human Rights)’ 회원이었고 둘이 한 퍼포먼스는 인종차별에 대한 명백한 반대 표시였다. 둘은 국제올림픽위원회의 징계를 받아 국가대표팀에서 제명됐다. 당시 은메달을 딴 호주 피터 노먼도 OPHR 배지를 가슴에 달고 시상대에 올랐다.



 1600m 계주에서 동메달을 딴 독일 마르틴 엘링하우스도 OPHR 배지를 달고 레이스를 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체조선수 베라 카슬라프스카는 시상식에서 소련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고개를 숙였다. 얼마 전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한 데 대한 항의였다. 그녀는 이후 오랜 기간 국제대회 출전이 금지됐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는 손기정, 동메달을 획득한 선수는 남승룡이었다. 당시 둘은 우리나라 사람이었지만 일본 국적이었다. 순위표에도 또렷하게 JAPAN이라고 국적이 명기돼 있었다. 손기정은 일본 시상대에 올라 고개를 숙이고 월계수로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가렸다.(관련 영상 보기)

 최근 국제 스포츠계에서 인종차별, 민족·국가말살과 같은 사건은 많이 줄어들었다. 특히 인종간 결혼으로 인해 혼혈 자녀들이 다수 생기는 등 구분이 불가능한 추세다. 타이거 우즈가 대표적이다. 우즈 부친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고 모친은 태국인이다. 그는 미국에서는 흑인으로 분류되지만 일본에서는 아시아인, 태국에서는 태국인으로 구분된다. 인종분류가 사회, 문화, 역사,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르게 보여진다는 걸 고스란히 증명하는 사례다. 다수 사람들이 우즈를 흑인으로 보지만 우즈는 자기 자신을 ‘카블리네이지언(Cablinasian)’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그가 창안한 혈통이다. 즉, 1/4은 태국인, 1/4은 중국인, 1/4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1/8은 토착 원주민 인디언, 나머지 1/8은 백인 유럽인을 아무르는 표현이다. Ca-bl-in-asian은 Caucasian + Black + Indian + Asian인 것이다. 피부색은 키와 같다고들 한다. 키가 작고 크다는 것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으며 지역, 국가, 인종에 따라 키가 크고 작음의 기준은 천차만별이다. 피부색도 마찬가지다. 색깔도 검은색에서 흰색으로 가는 스펙트럼과 같을뿐이다. 어디까지 흑인이고 어디까지 백인지는 어느 누구도 선을 그을 수 없다.


■올림픽과 테러

 올림픽 사상 가장 충격적인 테러는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발생했다. 그해 9월5일 검은 구월단(Black September)이라고 불리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 8명이 독일 뮌헨 올림픽 선수촌에 난입했다. 수류탄, 자동소총을 든 스포츠 백을 메고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이들은 이스라엘 선수들이 묵고 있는 침실로 침입해 레슬링 코치 한명과 역도 선수 한명을 사살한 뒤 미국 출신 선수 한명을 포함해 다른 선수 9명을 인질로 삼았다. 21시간 대치 끝에 구출작전이 시작됐지만 치밀하게 진행되지는 못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선수 10명, 코치 1명, 서독경찰 1명, 테러리스트 5명 등 총 17명이 죽었다. 올림픽은 하루 동안 중단됐지만 재계됐고 폐막식도 예정대로 열렸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당시 사건을 주제로 ‘MUNICH’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당시 올림픽 안전을 위한 비용은 200만 달러에 머물렀지만 32년 뒤인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는 그 비용이 1000배나 증가한 20억 달러였다. 2008년 올림픽을 주최한 중국은 올림픽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군인 4만3000명, 헬리콥터 47대, 전투기 74대, 군함 33척, 버스 1만8000대에 경비원 6000명, 버스정류장과 터미널 안전요원 3만 명, 감시 카메라 수 만대를 동원했다.

 1916년 올림픽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취소됐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1940년 동·하계올림픽과 1944년 동·하계올림픽이 모두 열리지 못했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서도 올림픽 개막 열흘 전 멕시코 군인들이 학생 등 수 백 명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멕시코 정부는 소요의 원인이 학생들에게 있다고 주장하자 학생들은 개막식에서 유혈진압에 대한 항의 표시로 검은색 비둘기 모양의 연을 날리기도 했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도중에는 센테니얼 올림픽 공원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나 2명이 죽고 111명이 다쳤고 그 사건을 일으킨 로버트 루돌프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현재 미국콜로라도 연방감옥에 수감돼 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날에는 그루지아와 러시아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올림픽과 스캔들

 가장 큰 사건은 1988년 서울올림픽 남자육상 100m에서 우승한 캐나다 벤 존슨이 약물복용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하고도 금메달이 박탈된 케이스다. 당시 미국 칼 루이스와의 세기의 대결로 세계인들의 관심이 집중된 레이스였기 때문에 존슨의 메달박탈은 세계 최고 톱뉴스였다. 당시 2위를 차지한 칼 루이스가 금메달 수상자로 바뀌었다. 벤 존슨은 지금까지 앤드리 잭슨이라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남자가 자신의 음식과 음료에 약물을 넣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벤존슨 칼루이스 기사>

 이후 선수들의 약물복용 등 도핑이 끊이지 않고 이뤄졌고 1999년에는 결국 세계반도핑기구(WADA)가 설립됐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2002년 동계올림픽에서는 약물양성반응을 보인 선수들이 급증했다. WADA의 철저한 검사로 인해 그동안 숨을 수 있었던 약물 복용 선수들이 대거 발각됐기 때문이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기간에는 3667명이 WADA의 검사를 받았지만 도핑에 걸린 선수는 단 3명뿐이었다.

 올림픽 초기에는 금지약물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었다. 1904년 파리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미국 토머스 힉스는 경기 전날 브랜디가 섞인 약을 복용했다. 1960년 로마대회에서는 암페타민이라는 약물을 과다 복용한 덴마크 사이클 선수가 레이스 도중 자전거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올림픽 역사상 약물복용 양성반응으로 메달이 박탈당한 사례는 1968년 올림픽 근대5종에 출전해 동메달을 딴 한스 군나르 리렌바르였다. 그는 도핑검사결과 술을 마신 걸로 드러났다.

<약물복용 선수 풍자 그림>

Posted by 김세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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