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눈물로 빚어낸 대한민국 올림픽 도전사

대한민국 이름으로 하계 올림픽에 처음으로 출전한 것은 제14회(1948년) 런던 올림픽이다. 물론 그에 앞선 10회(1932년) LA올림픽, 11회(1936년) 베를린올림픽에도 우리 민족은 올림픽에 나섰다. 그러나 그 때는 안타깝게도 우리 선수들은 일본 국적이었고 그 때 성적 또한 지금도 일본 것으로 돼 있다. 우리 민족이 쓴 올림픽 역사를 정리해본다. 사진은 대한체육회가 발생한 <대한체육회 90년사>에서 발췌했다.




■1932년 LA 올림픽=마라톤 김은배 권태하, 복싱 황을수 등 3명이 출전했다. 김은배는 6위, 권태하는 9위였다. 인도가 1900년 파리 올림픽에 출전했을 때 영국 식민지였다. 1924년 파리 올림픽 무대를 밟은 필리핀도 미국 식민지였다. 자국 국기를 앞세워 출전한 두 국가가 우리는 너무 부러웠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마라톤에서 1·3위가 나왔다. 1위는 손기정, 3위는 남승용이었다. 손기정은 시상식에서 일장기를 가리고 고개를 숙여 일본에 대한 반항을 표현했다(손기정과 관련된 내용은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농구 이성구 장이진 염은현, 축구 김용식, 복싱 이규환 등 5명도 우리 민족이었다.




■1948년 런던 올림픽=1945년 8월15일 광복을 맞았고 그해 11월26일 조선체육회가 재건됐다. 그러나 런던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IOC 총회로 가던 전경무 올림픽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이 항공기 추락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여운형 뒤를 이어 체육회장이 된 유억겸은 취임 50일 만에 유명을 달리하는 등 체육계 분위기는 나빴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조선올림픽위원회는 IOC에 가입했고 런던올림픽에 대한민국으로 처음 출전했다. 당시 출전비용이 부족해 국민을 대상으로 모금운동도 진행됐다. 역도 김성집, 복싱 한수안이 동메달을 땄다. 무려 18일 동안 배, 기차, 비행기를 갈아타고 런던까지 간 뒤 거둔 대단한 성적이었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전쟁 중에 어렵게 출전했다. 역도 김성집, 복싱 강준호가 동메달을 따 국민에 희망을 불어넣었다. 마라톤 최윤철은 4위에 머물렀다. 2년 전인 1950년 보스톤 마라톤에서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1·2·3위를 휩쓸었다. 6·25 전쟁만 없었다면 올림픽 마라톤 메달도 가능했을 것이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올림픽 첫 은메달을 복싱 송순천이 따냈다. 독일 선수와 맞붙은 결승에서 판정만 제대로 나왔다면 첫 금메달리스트도 될 수 있었다. 역도 김창희는 동메달을 획득했다. 마라톤 이창훈은 헬싱키 올림픽 최윤철처럼 다시 4위에 그쳤다. 레슬링에서는 이상균이 4위를 했다 이상균은 왼손 엄지부터 가운데까지 손가락 3개가 없었다(진한 감동과 아쉬움이 공존하는 멜버른 올림픽 세부내용은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1960년 로마 올림픽=1960년 3·15 부정선거에 이은 4·19혁명 등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체육회도 올림픽을 제대로 준비할 수 없었다. 노메달이었다. 최고 성적은 레슬링 봉창원, 역도 김해남이 기록한 4위. 아쉬운 건 복싱 김득봉이다. 김득봉은 8강전에서 우세한 경기를 하고도 2-3으로 판정해했다. 공교롭게도 59-60으로 김득봉이 진 걸로 판정한 게 일본 심판이었다. 김득봉이 이겼다면 준결승 상대가 부상으로 기권했기 때문에 최고 은메달이 가능했다.

■1964년 도쿄 올림픽=광복 후 일본에서 열리는 올림픽. 우리가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하는 건 당연했다. 도교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우수선수강화훈련단도 집중적인 훈련을 소화했다. 대회는 10월10일부터 열렸지만 우리 1진은 9월18일, 2진도 당초 일정을 앞당겨 9월23일 일본으로 갔다. 당시 재일동포들도 900만 엔을 모금해 대표팀에 전달했다. 참고로 당시 올림픽 출전예산이 2700만 엔에 불과했다. 복싱 정신조, 레슬링 장창선이 은메달을 땄고 유도 김의태가 동메달을 보탰다. 세선수가 모두 결승 또는 준결승에서 일본선수에게 패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도쿄대회 3분의 1수준으로 선수단이 줄었다. 금메달은 없었고 지용주가 은메달을 따는 등 복싱에서 은 1, 동 1개가 나왔다. 여자배구는 5위로 선전했지만 남자농구는 필리핀에게도 패해 14위에 그쳤다. 70년 방콕,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2연속 우승한 여자 포환던지기 백옥자는 메달권가 무려 5m 안팎에 뒤져 13위에 머물렀다.

■1972년 뮌헨 올림픽=유도 오승립이 은메달만 1개 따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북한에게 뒤진 걸 만회해야한다는 요구가 강했다. 75년부터 76년 초까지 선수 198명이 총 426일 동안 훈련했다. 당시 ‘선 체력, 후 기술’이라는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혹독한 훈련 때문에 여자배구 주전 박인실이 선수촌을 이탈해 제명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대한민국 올림픽 첫 금메달이 나왔다. 레슬링 양정모는 숙적 몽골의 오이도프에게 패했지만 벌점차로 금메달을 따냈다. 여자배구는 헝가리를 물리치고 3위에 올랐다. 한국 구기종목 사상 첫 메달이자 한국 여자 선수가 올림픽에서 따낸 1호 메달이었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불참했다.

■1984년 LA 올림픽=1981년 9월, 88년 서울올림픽 유치가 결정된 뒤 차기 개최국으로서 좋은 성적이 필요했다. 선수와 임원 등을 모두 합해 288명의 대규로 선수단이 파견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 결과로 우리는 금메달 6, 은메달 6, 동메달 7개로 사상 최초로 종합 10위에 진입했다. 유도가 금메달 2개(하형주 안병근),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로 효자노릇을 했다. 레슬링도 금 2개(김원기 유인탁), 은 1개, 동 4개로 잘 했고 복싱도 금·은·동을 한 개씩 보탰다. 유도·레슬링·복싱 등 투기 삼형제가 전체 19개 메달 중 16개를 책임졌다. 양궁은 금 1개, 동 1개를 획득했다. 박찬숙이 이끈 여자농구, 여자핸드볼은 값진 은메달을 따냈다.

■1988년 서울 올림픽=금메달 12개 등 33개 메달로 종합 4위에 올랐다. 총 메달수와 순위 모두 역대 최고. 양궁이 남자 개인전만 빼고 금메달 3개를 따냈다. 김수녕이 올림픽 최초 2관왕이 됐다. 격투기 삼형제 유도, 레슬링, 복싱이 금메달 6개, 은메달 3개, 동메달 5개를 합작했다. 한국이 따낸 금메달 12개 중 절반을, 전체 33개 메달 중 42%를 책임졌다. 탁구 남자 단식에서는 유남규와 김기택이 1·2위를 차지했다. 구기 종목에서는 여자 핸드볼이 금메달, 남자핸드볼과 여자하키가 은메달을 따냈다. 축구는 소련과 0-0, 미국과 0-0으로 비긴 뒤 아르헨티나에 1-2로 패해 8강에도 못 갔다(올림픽 유치와 대회 개최 등 서울 올림픽 세부내용은 다음 글에서 다루겠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종합 7위에 올랐다. 88년 대회에서 거둔 좋은 성적이 홈 어드밴티지만이 아니라는 걸 입증했다. 서울체고 2학년 사격 여갑순이 금메달을 땄다. ‘작은 거인’ 역도 전병관이 체급을 올려 금메달을 획득했다. 레슬링 박장순, 안한봉도 정상에 섰다. 처음으로 정식종목이 된 여자유도에서는 김미정이 초대 챔피언이 됐다. 여자핸드볼은 단체 구기종목 최초로 올림픽 2연속 정상에 섰다. 폐막일에는 마라톤 황영조가 금메달을 보탰다. 대회 마지막 금메달이었다. 56년 전 일장기를 달고 뛰었던 손기정은 당시 스탠드에서 황영조의 우승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다. 여갑순은 대회 1호 금메달리스트, 황영조는 최종 260호 금메달리스트였다. 대회 처음과 끝을 한국이 장식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금메달은 줄었지만 종합 순위 10위를 유지한 게 의미가 있었다. 레슬링 심권호가 첫 금메달을 땄다. 이 금메달은 한국이 동하계 올림픽을 통틀어 딴 100번째 메달이었다. 여자 유도 조민선은 5경기 연속 한판승으로 1위에 올랐고 전기영도 한판을 제외한 4판을 한판승으로 장식하며 금메달을 보탰다. 양궁 김경욱은 2관왕이 됐다. 가장 아쉬운 장면은 마라톤 이봉주였다. 이봉주는 1위 조시아(남아공)에게 불과 3초 뒤진 2위에 만족해야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사상 최초로 남북한 공동 입장이 이뤄졌다. 양 팀을 합해 180명 선수단이 흰색 바탕에 하늘색 한반도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KOREA’라는 이름으로 아리랑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96번째로 메인 스타디움에 들어섰다. 사격 강초현이 마지막 발을 실수해 은메달에 그쳤다. 남자 펜싱 이상기는 한국 펜싱 사상 첫 메달을 동메달로 장식했고 나흘 후 김영호는 그걸 금빛으로 바꿨다. 처음으로 정식정목이 된 태권도에서는 3개 금메달이 나왔다. 야구가 동메달을 따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종합순위 톱 10에 다시 진입했고 메달도 서울올림픽 이후 최다인 30개를 따냈다. 유도 이원희, 양궁 박성현, 태권도 문대성, 남자탁구 유승민, 배드민턴 김동문-하태권조, 레슬링 정지현이 금메달을 따냈다. 김대은은 한국 남자 체조 역사상 개인종합에서 처음으로 은메달을 획득했고 양태영은 마지막 철봉종목에서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저조한 점수를 받아 안타까운 은메달에 그쳤다. 여자핸드볼은 덴마크와 2차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승부를 가리지 못한 뒤 이어진 승부던지기에서 2-4로 패해 은메달에 만족했다. ‘우생순’이 나온 계기가 된 장면이다. 남자축구는 처음으로 8강에 들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금메달 13개로 최다 금메달을 따냈다. 수영 박태환은 한국 최초 올림픽 메달을 획득했다. 자유형 400m에서 우승한 박태환은 200m에서도 은메달을 추가했다. 역도 장미란은 세계기록을 거푸 갈아치우며 정상에 올랐다. 여자역도 종주국격인 중국 한 복판에서 거둔 통쾌한 금메달이었다. 진종오는 16년 만에 사격 금빛 과녁을 적중시켰고 태권도는 4개 종목을 싹쓸이했다. 야구는 9전 전승으로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대회 개막전 영화 <우생순>이 개봉되면서 관심을 끈 여자핸드볼은 안타까운 동메달을 따냈다. 문대성은 대회 기간 중 IOC 선수위원투표에서 29명 중 1위로 선수위원으로 선임됐다.

 

 

Posted by 김세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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