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한국이 따낸 가장 값진 올림픽 메달은?

 

 

올림픽 메달. 어느 하나 값지지 않은 게 없다. 모두 선수의 땀과 노력이 배어있고 고통과 고뇌를 이겨낸 훈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림픽에 출전할 당시 열악한 상황,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던 우리나라 국가적인 위상, 그리고 우리나라 스포츠의 수준 등을 감안하면 다른 메달에 비해 상대적으로 값어치가 있는 메달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우리나라가 올림픽에서 따낸 메달 중 그런 메달은 어떤 것일까.


■전쟁 중에 온갖 우여곡절 끝에 출전한 1952년 헬싱키 올림픽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최대 올림픽 유산으로 꼽는 대회는 어떤 것일까. 그건 1952년 헬싱키 올림픽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6·25 전쟁 포화 속에서도 출전한 대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1952년 2월 오슬로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이어 헬싱키올림픽 출전도 체육계 각 단체가 온갖 잡음만 일으킬 뿐 진전이 없었다. 그해 1월 “헬싱키 올림픽에 출전해달라”는 IOC 브런디지 위원장의 요구도 무산되는 듯 했다. 그 때 여기저기에서 올림픽 출전을 위한 움직임이 생겼다.

UN군으로 참전한 미군이 한국 선수단 파견비용을 모금했다. 해외동포도 돈을 보내왔다. 국회의원도 세비 중 10%를 갹출했다. 5사단 장병들은 480만원을 모았고 미8군 사령관은 1만4000달러를 내놨다. 서울대학교는 140만원을 내놨고 내무부도 78만원을 모으는 등 전국적으로 모금운동이 벌어졌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우리 선수단 44명은 6월12일 부산에서 항공편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뒤 30일 비행기로 헬싱키에 도착했다. 우리는 육상, 역도, 복싱, 레슬링, 승마, 사이클 등에 출전했다. 역도 김성집, 복싱 강준호가 귀한 동메달을 따냈다. 김성집은 한국 선수 처음으로 올림픽 2대 대회 연속 메달을 따낸 선수가 됐다. 마라톤에서는 최윤철이 올림픽 기록을 깨뜨리고도 4위에 머물렀다.


■전국적인 모금 운동이 일어났던 광복 후 첫 올림픽인 1948년 런던올림픽




한국은 1947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로부터 정식 가입국으로 승인받았다. 이듬해인 1948년 런던올림픽은 대대적인 모금 운동 덕분에 출전할 수 있었다. 우리는 육상, 축구, 농구, 복싱 등 7개 종목에 67명을 파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종목 단체들 간 알력이 심했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 선수단을 올림픽에 보내야했기 때문에 미군정이 비용을 대줘야 출전이 가능했다. 그 때 우리는 친일파로 배척받아온 이상백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체육계 고위임원을 역임했고 1932년 LA올림픽과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일본 선수단 고위직을 맡은 사람이었다. 이상백씨는 맥아더를 움직인 것으로 알려졌다. 맥아더는 1928년 암스테르담올림픽을 미국 선수단 단장으로 참가했고 그 후 2년 동안 미국올림픽위원장까지 맡은 체육인이다. 그와 함께 올림픽 출전 후원금 마련을 위해 올림픽 후원권이 판매되기도 했다.

<올림픽 후원권>


그해 6월21일. 67명 선수단은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그리고 배편으로 후쿠오카로 간 뒤 다시 기차편으로 요코하마로 이동했다.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홍콩으로 건너갔고 홍콩에서 두 개 그룹으로 나뉘어 항공기를 이용해 암스테르담을 거쳐 런던에 도착했다. 당시 마라톤에 참가한 함기용(82)옹은 “약 열 여드레 동안 배, 기차, 비행기를 갈아타고 런던까지 갔다”면서 “가는 동안 배 갑판에서, 비행기가 주유하러 잠시 내린 공항에서도 훈련하다 보니 정작 도착했을 때는 기진맥진해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그래도 우리는 동메달을 두 개나 따냈다. 역도 김성집과 복싱 한수안이다. 대한민국 이름으로 따낸 첫 메달이었다.

<김성집 동메달 획득 사진>


  ■노골적인 편파판정 속에 금메달이 은메달로 바뀐 1956년 멜버른 올림픽

한국은 7개 종목에서 선수 48명을 파견했다. 당시 따낸 메달 중 가장 안타까운 게 복싱 송순천이 따낸 은메달이었다. 당시 송순천이 결승에서 만난 선수는 독일 베렌트였다. 송순천은 베렌트를 압도했지만 판정은 베렌트 승리로 나왔다. 송순천은 당시 “졌다고 전혀 생각되지 않는다. 나뿐 아니라 동양 선수들은 모두 억울한 대접을 받았다. 나와 싸운 대부분 선수들이 KO되지 않은 건 심판 때문이었다. 그렇게 붙잡고 늘어져도 실격시키거나 벌점을 주지 않은 건 분명히 규정에 어긋난 처사였다”고 분개했다.

<송순천 시상식>


금메달리스트 베렌트도 패배를 인정했다. 7년이 지난 1963년 베렌트는 대한체육회로 송순천에 편지를 보내왔다. 베렌트는 편지에서 “그날의 결승전, 그리고 당신을 잊을 수 없다. 그 때 게임은 당신이 이긴 것이다. 서독 친구를 통해 당신이 최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리 알았다면 선물이라도 보냈을 것이다. 1964년 도쿄올림픽에 꼭 만나고 싶디“고 적었다. 우승자도 편파판정을 인정한 것이다. 당시 판정만 제대로 나와 송순천이 이겼다면 한국 최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양정모가 아니라 송순천이었을 게다.

<송순천이 훈련한 한국체육관>


34세 노장 역도 선수 김창희는 동메달을 따냈다. 김창희는 메달을 따낸 뒤 “올림픽 선수촌 식사가 좋아서 멜버른에 도착한 뒤 날이 갈수록 체력이 늘어나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당시 충분한 영양섭취를 하지 못한 게 안타깝게 느껴졌다.

또 다른 감동을 안겨다준 선수는 레슬링 이상균이었다. 이상균은 4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가 거둔 4위라는 성적표는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이상균은 왼손 엄지손가락부터 가운데 손가락까지 3개가 없었다.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금까지는 1951년 수류탄 뇌관을 잘못 뽑으면서 터져 손가락이 날아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레슬링 선수가 손가락이 없으면 힘을 제대로 쓸 수 없다. 그가 차지한 4위는 메달 못지않게 소중한 이유다. 이후 이상균은 지도자가 돼서 1964년 도쿄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장창선 등을 길러냈다.

마라톤도 너무 안타까웠다. 당시 이창훈은 2시28분45초, 4위로 골인했다.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 이은 2개 대회 연속 4위. 국제대회 경험 부족 때문에 메달리스트가 되지 못한 게 뒤늦게 알려졌다. 이창훈은 “오후 3시18분 출발을 앞두고 날씨가 너무 더워 선수들은 주경기장 안에 냉방장치가 잘 돼 있는 곳에서 기다렸다”면서 “기온이 너무 낮아서 벌벌 떨 정도였다”고 말했다. 이창훈은 이어 “나는 나이가 어려서 대회 본부가 시키는 대로 무조건 해야 하는 걸로 알고 꾹 참고 있다가 출발시간이 다 돼 밖으로 나가라고 할 때 나왔다”면서 “막상 밖으로 나와 보니 다른 선수들은 미리 나와서 몸을 풀고 난 이후였다”고 덧붙였다. 이창훈은 37km에서 헬싱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자토펙을 제치는 등 있는 힘을 다 했다. 그러나 그는 3위보다 58초 뒤진 기록으로 4위로 골인했다. 제대로 워밍업만 했으면 메달도 가능했다.

 

 

 


Posted by 김세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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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뭉클하네요 2012.08.14 11: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좀처럼 만나보지 못했던 얘기들...
    감솨~